울음의 위치, 빈곳을 향해
관악산 위 노부모의 집, 현관문 앞 작은 방에 누워 있던 어느 순간이 기억난다. 삐걱 열리는 짙은 회색 현관문을 지나면 형형색색 오래된 신발들이 각자 자신의 방향을 보고 있다. 왼편의 황토색 문지방과 문틀을 넘어 들어가면, 바로 앞에 빛 바랜 분홍색 프레임 위 오래된 작은 싱글 매트리스 하나가 놓여 있다. 그 너머에는 문틀과 같은 색의 기울어진 책상과 창문이 있다. 나는 그 매트리스에 누워 있을 때마다 그 방이 어떤 아코디언 같은 장소가 된다고 느꼈다. 접혔다가 펴지는 곳. 길지 않은데 길어지는 곳. 몸속의 터널과 닮은 공간. 목구멍이나 장기 사이의 통로처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지나야 하는 곳. 그 방은 이상하게도 늘 작았고, 동시에 너무 컸다. 누워 있는 몸 하나를 겨우 받쳐주는 방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지나간 시간들이 쉽게 접히고 펴졌다. 어떤 기억들은 그곳에서 다시 얇아졌고, 어떤 소리들은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그곳에 멍하니 누워 있던 여름 초저녁, 벽지의 무늬에 시선을 놓고 터널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잠겨 있을 때 세 가지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나는 매미 울음소리였다. 매미가 울 때면 나는 익숙한 여름, 여러 번의 여름이 겹겹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한참을 그 소리에 몸을 맡기곤 했다. 그렇게 매미의 울음소리를 향해 열어젖힌 창문 밖으로는, 다세대 주택답게 어김없이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매미의 소리와 아이의 울음은 서로 이질적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대로 하나의 환경이 되어, 무료하고 그럭저럭한 초저녁을 내게 선물했다. 딱 이런 온도가 가장 익숙하고 어두우면서도 편안한 것인지, 그 안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그 자리에 여러 울음소리가 참 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울음은 언제나 누군가의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장소의 것이기도 했다. 어떤 울음은 사람에게서 나왔고, 어떤 울음은 벽지와 창문과 방충망에 붙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푸르른 초저녁, 먼지 쌓인 방충망 사이로 어른의 울음소리가 들린 적이 있다. 그 순간 노부모의 집이 11층이라는 사실이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다가왔다. 울음은 아래에서 올라오는지, 옆에서 번지는지, 위에서 떨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몸의 말단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고, 누워 있던 몸은 어딘가를 향해 기울기 시작했다. 매미소리나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던 몸과는 달리, 나는 어쩐지 몸둘 바를 모른 채 그 어른 울음의 위치와 경위를 추측함으로써 겨우 공감해내려 했다. 거리에서 울고 있는 것일까, 2층이나 3층의 누군가일까, 도움이 필요한 것일까. 상상하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 상상조차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부채감 속에서, 축축하게 오래된 매트리스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은 사실 벽 너머 거실에서 터져 나오던 어미의 울음소리를 들은 지 불과 3, 4년 뒤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알게 된 것 같다. 어떤 울음은 들리는 순간부터 듣는 사람의 몸 안에 다른 위치를 만든다는 것을. 그 위치는 소리의 출처가 아니라, 소리를 들은 몸이 더는 이전과 같은 자세로 누워 있을 수 없게 되는 자리였다.
김보라 안무가가 처음 작품의 제목이 O:ro라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그 동그라미 안으로 위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몸의 기억이 자꾸 담기는 것을 느꼈다. 닫힌 원이라기보다 비어 있는 곳. 누군가를 담기 위해 벌어진 자리. 울음이 잠시 고였다가 다시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자리. 나에게 O:ro는 처음부터 어떤 작품의 제목이라기보다, 울음을 닮은 소리의 위치를 찾으려는 몸의 방향처럼 다가왔다. 창밖의 그녀와 기억 속 벽 너머 어머니의 위치와 경위를 계속 유추하게 하는 이름. 나는 빈 구멍을 향해 있는 나의 몸의 위치를 겹쳐가며, 그녀가 싱가포르 T.H.E Dance Company의 무용수들과 함께 그려가는 연습과 존재 양태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터널도 다시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그 기울어짐은 이미 몸 안에 있던 오래된 방향이 다시 열리는 일이었다. 작품을 보는 동안 나는 자꾸 밖을 향해 있었고, 동시에 안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싱가포르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호랑이가 자주 심상에 떠오른다고 이야기했을 때도 이 춤들 덕분에 나는 그 말을 하나의 이미지 그 이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 축축하고 습한 공기 중의 분자 어딘가에, 오래전 이 땅에서 사라져간 호랑이의 분자도 흩어져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싱가포르의 근대화 역사 안에서 사라진 호랑이들, 혹은 또 다른 비인간 존재들. 밀려난 것들, 이름 없이 죽은 것들, 기록되지 않았거나 기록되었으나 곧 납작해진 몸들. 그녀는 그들을 설명하려 하기보다, 그들을 향해 몸을 열고 있었다. 죽기 전 그들은 어디에 모였을까. 서로를 보았을까. 쓰러졌을까. 널브러졌을까. 울었을까. 그녀는 조용히 질문했다. 그 질문들은 호랑이를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이곳의 공기와 무용수들의 몸, 그리고 아직 형태를 얻지 못한 애도의 방향을 향한 것이었다. O처럼 열린 그녀의 심상과 몸은 그렇게 다공적인 상태를 계속 초대하며 안무의 여정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녀가 정가에 대한 끌림을 이야기해주었을 때, 나는 그것이 그 열린 공간을 향해 가는 또 하나의 통로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정가를 언어와 언어 사이를 길게 늘여뜨리고, 의미가 너무 빨리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연습으로, 한 음 안에 오래 머무는 일로, 무언가를 부르면서 동시에 놓아주는 일로 이야기했다. 그녀가 스스로 때로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불렀던 작은 소리들이 정가를 만나는 과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호랑이의 심상이 사라진 몸들을 향해 열리는 구멍이었다면, 정가는 그 구멍 안으로 너무 빨리 떨어지지 않기 위해 숨을 길게 늘이는 방법처럼 보였다. 그때 내게 사변적 가정이 하나 생기기 시작했다. 정가가 우리의 선조들의 곡조이기 이전에, 혹은 곡조가 되기 이전에, 어떤 신체화의 단계에서 발생한 소리가 아니었을까. 어떤 몸이 너무 오래 참다가, 말할 수 없어서, 그러나 침묵할 수도 없어서 숨을 길게 늘인 일. 사라진 것을 만지고 듣기 위해 입 안을 비워낸 일. 그런 몸의 방법이 오랜 시간 후에 곡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느 아침, 싱가포르에서 우는 새소리를 정가의 식임새와 비교한 적도 있다. 어쩐지 그 말이 믿어졌던 것은, 그 새의 울음소리와 오래전 사람들의 목 안에서 일어난 일이 서로 닮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은 증명할 수 없지만, 들을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보라 안무가가 지금 이때, 이 새소리를 들으며, 호랑이의 심상을 떠올리며, 싱가포르 무용수들과 정가를 함께 부르며, 이곳에 춤추며 있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O, 그 벌어진 동그라미에 담기기 위해, 우연처럼, 필연처럼, 그녀는 이곳에 있었고, 무용수들을 만났다. 새의 소리와 정가의 식임새, 호랑이의 잔상과 무용수들의 호흡은 서로 다른 출처를 가지고 있었지만, 매일의 연습을 통해 같은 방향을 향해 조금씩 모이고 있었다. 서로 다른 것들이 같은 빈자리를 향해 귀를 기울이는 일이었다.
내가 가까이서 본 그녀의 안무 방법은 무언가를 빠르게 형상화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형태가 되지 않은 감각이 너무 빨리 장면이 되지 않도록, 그 감각 곁에 오래도록 용감하고 조용히 머무는 일이었다. 그녀는 직접 무용수들과 접촉하거나, 유령처럼 사라져 구석에서 보는 것을 적재적소에 선택하며 공간과 공동의 상태를 조율했다. 그녀는 호랑이를 상징으로 고정하지 않았고, 정가를 하나의 음악적 재료로만 사용하지 않았으며, 혀와 꼬리뼈를 해부학적 연결로만 다루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지금 이곳 싱가포르에 있는 이 무용수들의 몸의 공간 안에서 천천히 서로를 찾아가는 방향들이었다. 그녀의 안무는 이미 정해진 이미지를 몸에 입히는 방식이라기보다, 열린 공간으로서의 몸이 먼저 감지한 것을 기다리고, 그것이 소리와 호흡, 중력과 관계, 그리고 심상 속에서 조금씩 나타나도록 정교하게 허락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소리는 몸 안에서 먼저 일어난다. 피부를 만지는 일이 몸의 표면을 깨운다면, 소리를 내는 일은 몸의 안쪽을 흔든다. 심장박동, 땀, 열, 목의 떨림, 혀의 무게, 횡경막의 움직임 같은 것들. 감정은 때때로 말보다 먼저 이런 것들로 온다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떨고 있고, 두렵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혀를 깨물고 있으며, 울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목 안쪽이 좁아져 있다. 소리는 내부수용감각의 관점에서 몸의 내부를 진동으로 만지는 일이 될 수 있다고 그녀에게 말했을 때, 그녀는 “아, 그래서 내 몸이 그것들을 찾았군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고, 말이 나중에 온 순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것이 잠시 이름을 얻는 순간. 그러나 그 이름조차 완전하지 않아 다시 몸으로 돌아가는 순간. 나는 그 대답에서 그녀가 몸을 대하는 차분하고 강력한 태도를 보았다. 몸이 가리키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면서도, 그것을 곧바로 개념으로 붙잡지 않고 다시 연습 안으로 돌려보내는 태도. 몸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려는 태도는 그녀가 무용수를 만날 때마다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심부전방선이 발의 깊은 곳에서 시작해 다리 안쪽과 골반, 횡경막과 목을 지나 혀에 이르는 하나의 근막적 경로로 설명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도, 그녀는 이미 혀를 씹는 연습들을 통해 정가의 소리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이 작품을 위해 무용수들과 부르고, 떠나고, 머물고, 울고, 다시 서는 일을 춤 연습 안에서 반복하는 동안, 그녀의 혀는 몸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몸이 다시 공기 중에 흩어진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마도 알기 전에 먼저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혀는 이 작업에서 단지 소리를 내는 기관이 아니라, 몸 안쪽과 바깥의 세계가 잠시 맞닿는 문지방처럼 보였다. 그것은 노래하기의 기관이기 이전에 사라진 것들이 들어오는 작고 어두운 입구였다.
T.H.E의 무용수들과 이야기하고, 이끌고, 시범 보이는 안무가를 볼 때에도 나는 그녀가 어떤 문턱에 서 있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너무 안으로 들어가버리지도 않고, 완전히 밖에 머물지도 않는 사람.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무용수들에게 그대로 넘기지 않으려는 사람. 그녀는 설명했고, 보였고, 기다렸다. 때로는 아주 투명하게 말했고, 때로는 말을 거두었다. 그녀의 몸에는 내려놓음과 짊어짐이 함께 있었다. 어떤 짐은 내려놓고, 어떤 짐은 다시 들었다. 그 일은 하루에도 여러 번 기꺼이, 그리고 아주 성심성의껏 반복되었다. 나는 그 반복을 보며, 안무가가 무용수들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어떤 감각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의 통로를 지켜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앞에 서 있었지만, 앞에서 끌고 간다기보다 사이에 서 있었다. 무용수들과 사라진 것들 사이, 소리와 몸 사이, 애도와 형식 사이에서 진동했고, 기울어졌고, 공간을 만들었다.
그녀가 꼬리뼈와 혀가 연결되어 꿈틀거리게 하고, 그것이 듣고 노래하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문지방의 신체로 남아 있는 법을 연습하는 동안, 나는 다시 한번 신체화에 대해 생각했다. 몸이 대신 말하는 일. 몸이 먼저 아는 일. 슬픔이 정강이로 오고, 두려움이 꼬리뼈로 오고, 오래 참은 말이 혀의 가장자리로 오는 일. 안무가와 나는 각자가 느낀 신체화의 감각을 웃으며 나눈 적이 있다. 그녀가 느끼는 꼬리뼈의 강렬한 감각, 내가 느꼈던 떨리는 정강이의 슬픔. 우리는 그것을 가볍게 말했지만, 가볍지 않았다. 말은 웃음을 통과했고, 웃음은 혀를 통과했고, 혀는 다시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말들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연습 안에서 다른 형태로 돌아오는 듯했다. 꼬리뼈의 작은 떨림으로, 입 안의 긴장으로, 손을 잡았다 놓치는 시간의 지연으로.
그녀가 리허설 디렉터 박상미, 리허설 어시스턴트이자 아키비스트 최소영, 그리고 T.H.E의 무용수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O의 공간에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힘이 있었다. 모으는 힘과 밀어내는 힘. 손을 잡는 힘과 손을 놓치는 힘. 함께 가는 힘과 혼자 떨어지는 힘. 연습을 보던 중 나의 심상에 오래 남은 장면들이 있다. 손을 잡고 나아가던 몸들. 흘러내리는 듯하면서도 입이 벌어진 얼굴들. 식물 같았던 몸들. 시간이 진흙처럼 늘어나던 순간. 손이 놓이는 순간 갑자기 달라지던 리듬과 중력의 방향, 공기의 두께. 그리고 오픈 스튜디오 쇼잉에서 그 손이 놓였을 때, 내가 본 관객들의 표정. 나는 그 얼굴들을 잊지 못한다. 그들은 잠시 설명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 설명을 잃었기 때문에 더 정확히 보고 있는 얼굴들. 이해하려는 얼굴이 아니라, 이미 몸 어딘가가 기울어진 사람들의 얼굴. 어쩌면 노부모의 집에서 방충망 사이로 들리는 이름 없는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나에게도 비슷하게 드리워졌을 그 얼굴.
어떤 장면은 이해되기 때문에 남는 것이 아니다. 이해되지 않아서 남는다. 끝내 닫히지 않아서, 어떤 동그라미가 생겼기 때문에. 나는 이 작업을 생각하며 잊힌다는 것과 잊히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심상에 담긴 호랑이의 모습, 나의 심상에 남은 무용수들의 눈꺼풀과 느린 몸들, 손이 놓이는 순간의 작은 공기 변화, 그리고 울음의 위치를 끝내 알 수 없었던 저녁.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기억이 온전히 보관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어떤 것이 비어 있는 채로 남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다 채워지지 않은 채, 설명되지 않은 채, 그러나 계속 우리 몸을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 그 빈자리는 마음이 돌아올 수 있는 자리였다. 울음이 다시 들릴 수 있는 자리, 손이 다시 놓일 수 있는 자리, 사라진 것들이 잠시 혀와 꼬리뼈 사이를 지나갈 수 있는 자리.
O:ro는 그 향함의 작업이다. 사라진 것을 완전히 부르지 못할 때, 울음의 위치를 끝내 알 수 없을 때, 애도의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몸이 그쪽으로 향해버리는 일. 작품의 시작에서 무용수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혀를 내어주고, 아름답고 습한 싱가포르 공기 중에 흩어진 영혼들을 듣고 소환한다. 그것들은 혀로 들어오고, 혀에서 목으로, 목에서 횡경막으로, 횡경막에서 골반과 꼬리뼈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기억 속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O:ro> 아티스틱 컨설턴트, 장혜진
